<?xml version="1.0" encoding="utf-8" ?>
<?xml-stylesheet href="http://rss.egloos.com/style/blog.xsl" type="text/xsl" media="screen"?>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Soul Food</title>
	<link>http://egeria.egloos.com</link>
	<description>글그림</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06 Sep 2008 16:15:11 GMT</pubDate>
	<generator>Egloos</generator>
	<image>
		<title>Soul Food</title>
		<url>http://pds8.egloos.com/logo/200803/13/46/e0089846.jpg</url>
		<link>http://egeria.egloos.com</link>
		<width>80</width>
		<height>80</height>
		<description>글그림</description>
	</image>
  	<item>
		<title><![CDATA[ Red flag on open access to the aggregate genomic data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2005896</link>
		<guid>http://egeria.egloos.com/2005896</guid>
		<description>
			<![CDATA[ 
  <p>지놈&nbsp;데이터 자체의 완전 공개의 문제점 (DNA를 통해 개인을 역추적할 수 있다는 점) 은 익히 잘 알려진 것이고 그에 대한 보호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그 보호장치란 적절한 승인 절차를 통해 허가받은 사람들만&nbsp;데이터를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허가는 데이터 유출을 최대한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Aggregate genomic data 즉 일차 데이터가 아닌 그 데이터를 분석한&nbsp;결과들: 주로&nbsp;SNP의 p-value들, MAF (Minor Allele Frequency)등 개인레벨의 정보가 아닌 집합적인 레밸의 데이터는 연구 주체들이 데이터를 공개할 의향이 있는 경우 퍼블릭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특별한 승인 절차 없이 공개해왔다. 심지어 NIH는 Genomic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이런식의 데이터 공유를 권장하고 퍼블릭 데이터베이스들을 운영해왔으며, NIH의 펀딩을 받은 모든 Genomic 연구의 데이터나 결과를 오픈하기로 방침을 정했다.<br><br>그런데 9월 4일자 <a href="http://www.sciencemag.org/cgi/rapidpdf/1165490.pdf">Science Express&nbsp;Letter : Protecting Aggregate Genomic Data&nbsp; </a>는 Aggregate genomic data에 대한 일반 공개(open access)를 취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최근 Plos Genetics 8월호 (Volume 4, issue 8) 에 실린 Homer et al. 의 논문 때문이다. 이 논문의 연구자들은 UCLA의&nbsp;Forensic Genetics계열의&nbsp;연구자들로, 이들이 애초에 풀려던 문제는 Mixture DNA 즉, 여러 사람의 DNA가&nbsp;섞여진 샘플의 DNA분석 결과를 가지고&nbsp;어떤 특정인의 DNA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찾아는 문제였다. 즉 범죄 현장에서 구한 샘플에 여러명의 DNA가 섞여 있을 경우 특정인의&nbsp;DNA를&nbsp;구별해 내기는 아주 어려운데, 특히 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 binary genetic markers) 정보를 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다. Homer et al. 은 SNP을 이용해서 특정인이 Mixture DNA sample에 속해 있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해 내는 통계적 방법을 발견했다.&nbsp;그 방법은 개인의 MAF (0, 0.5, 1의&nbsp;세가지 값을 가지는)를 가지고&nbsp;reference population의 MAF와 mixture sample의&nbsp;MAF사이의 거리를 이용한 수치를 각 SNP마다 구한 후&nbsp;모든 SNP에 대해 집적된 값을 구하여 mixture sample에&nbsp;얼마나 가까운지를 계량하는 것이다. <br><br>그런데 범죄의 증거를 도출하기 위한 이&nbsp;연구의 내용이 aggregate genomic data의 경우에도 똑같이 이용될 수가 있음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즉, 누군가 어떤 특정인의 DNA정보를 입수했다면, 그 개인이&nbsp;어떤 공개된 연구에 참가 했는가 아닌가 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NIH는 aggregate genomic data의&nbsp;일반 공개&nbsp;방침을 일단 임시적으로 철회하고 앞으로 좀더 확실한 방침을 정할때까지 비공개로 돌려 버렸다. <br><br>어찌보면 누가 무슨 의학 연구에 참가 했다는 점이 뭐 대단한 개인정보인가 싶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HIV에 걸렸는지를 이 방법을 통해 알아낼 수도 있다는&nbsp;사례를 생각해 보면&nbsp;결국 이는 적절한 조치이다. HIV의 감염 여부는 철저한 비밀로 유지되고 있는데 HIV 감염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서 관련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이 많은 편이다. 이런 경우엔, 그야말로 손쉽게 누군가의 질병여부를 알아낼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버리는 것이다.&nbsp;<br><br>물론 이 뉴스는 과학자들에겐&nbsp;상당한 불편함을 초래할 것이다.&nbsp;&nbsp;원본&nbsp;지놈 데이터를 복잡한 절차를 통해&nbsp;받아 본 경험이 있는데, 참여자 십여명이 모두 몇시간씩 걸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하고 그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인력을 들여서 환경을 마련한 후&nbsp;수십장의 신청서을 제출하면 다시&nbsp;몇 주가 지나야 허가가 나왔다.&nbsp;그와 반대로 aggregate data의 경우엔&nbsp;얼마전에 일반 공개되어 있는 데이터를 클릭 몇번에&nbsp;다운 받기도 하고,&nbsp;혹은 연구자에게 연락해서 간단한 양식만 사인한 후 이메일로&nbsp;손쉽게 데이터를 받았는데 이제 그런&nbsp;식으로 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br><br>최근&nbsp;지놈 연구 논문들 중 이런 공유된 데이타를 가지고 이루어진 메타 분석이나 혹은 자신들의 연구에 메타분석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으로도 그런 트랜드가 유지될 지 지켜볼 일이다.</p>			 ]]> 
		</description>
		<category>왜냐면</category>
		<pubDate>Sat, 06 Sep 2008 15:54:30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미덕을 보이지 않음에 대한 비난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892031</link>
		<guid>http://egeria.egloos.com/1892031</guid>
		<description>
			<![CDATA[ 
  1. 미덕은 법이 아니고 심지어 원칙도 아니다.<br>1. 미덕은 특수한 사례이고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다.<br>1. 미덕은 남을 이롭게 하기에 칭송받아 마땅하다. <br>1. 그러나 미덕을 보이지 않음을 비난하는 것은 월권이다. <br><br>미덕을 법으로 하지 않은 것이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미덕은 선한 것에 대한 개인적 신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개인적 신념이라는 이유로 강제성을 부과하는 근간이 되지 못한다. 공동체가 사적 신념을 넘어서&nbsp;'필요'하다고 합의한 것들이 법이다. 특히 헌법이&nbsp;개인의 기본권을 폭넓게&nbsp;보장하는 경우에는,&nbsp;소수의 다른 신념의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할&nbsp;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은 심지어 합의가 존재해도 법이 될 수 없다. <br><br>미덕에 대해 칭송하거나 추구하지만,&nbsp;미덕을 보이지 않음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는 자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가진 권리와 자격에 대한 현대적 정신을 섬세하게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nbsp;미덕을 칭송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개인적 신념은&nbsp;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인지적 틀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내 눈에 자명하게 "좋고 선한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미덕을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 미묘한 선을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미덕을 행하거나 권장하는 것에까지 그어진 선을 넘어, 행하지 않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교조적이 되는&nbsp;것이다.<br><br>이 작은 민주적 태도와 그 대단한 미덕 사이에서, 왜 나는 민주적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선을 넘어가는 사람들은 미덕을 오염시키게 되며, 민주적 태도는 순수한 미덕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nbsp;미덕을 의무로 바꾸어 버리는 순간, 미덕은 사라져 버린다. 			 ]]> 
		</description>
		<category>왜냐면</category>
		<pubDate>Wed, 23 Jul 2008 12:53:04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러시안 펍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853672</link>
		<guid>http://egeria.egloos.com/1853672</guid>
		<description>
			<![CDATA[ 
  <br>학회가 열린 도시에서 학회 마지막 밤에 찾아간 러시안 펍에는 구소련의 선동 포스터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3cbd75a.jpg" width="299"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3cbd75a.jpg');" /></div>사진은 찍지 않았고, 구글에 "Russian Poster"나 "Vitage Soviet Poster"라고 치면 사이트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꽤 멋진 작품들이 많아서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같이 간 일행중 어릴 적 구 소련 폴란드에서 자란 라팔은 "구 소련에 대한 향수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펍으로 일행을 데리고 간 로랑은 프랑스 출신이어서 그런 반감이 없다.&nbs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4f880cf.jpg" width="400" height="54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4f880cf.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div><div style="TEXT-ALIGN: center">쉿!</div><br>그러나 그냥 이 러시안 펍은 대학생들한테 딱 어울리게 예술적이면서 정치적인 분위기를 폴폴 낼 뿐이다. 가끔 라이브 무대가 있고, 요즘은 커다란 티비에 축구를 틀어 준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6e8ade5.jpg" width="283"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6e8ade5.jpg');" /></div>우린 민주주의에 대해 중구 난방으로 새벽 2시까지 수다를 떨었는데...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의 이라크전을 좋게 생각하는&nbsp;라팔이나 쿠바를 찬양하는 로랑까지...)&nbsp;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다. 다들 이렇게 지맘대로 토론하기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8175ae9.jpg" width="286" height="4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09/46/e0089846_48742a8175ae9.jpg');" /></div>담배 피라는 포스터. 옮겨온 포스터들은 A Soviet Poster A Day란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것들임.<br>갔었던 펍은 오타와에 있는 "Avant-Garde Bar". <a href="http://www.avantgardebar.ca/">http://www.avantgardebar.ca/</a>			 ]]> 
		</description>
		<category>Pictorama</category>
		<pubDate>Wed, 09 Jul 2008 03:25:13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인가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806835</link>
		<guid>http://egeria.egloos.com/1806835</guid>
		<description>
			<![CDATA[ 
  직접민주주의의 멋진 어감에 끌려 막연하게 직접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잘 생각해 보시라고 드리는 말씀이다.<br>우리나라가 직접민주주의국가에 속하게 되려면&nbsp;1) 국민들의 몇% 이상의&nbsp;서명으로 법안등을 발의할 수 있어야 하고, 2) 중요한 법률 제정 등의 행위에 관해서는 국민 투표를&nbsp;통해 결정해야 하고, 3)정치인의 국민 소환제가 가능해야 한다. 혹 이 중의 한 두가지라도 따르게 되면 직접민주주의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br><br>직접 민주주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와는 별 상관이 없다. 집회와 시위는 직접민주주주의든 간접민주주의든 민주국가에서&nbsp;보증하는 자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촛불집회 자체가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nbsp;그렇지 않다고 본다. 집회를 대대하게 하는데도 정치권이 이를 반영하지 않아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이 대두될 뿐이지, 집회의 구호의&nbsp;압박으로 정치권이 정책의 방향을 돌리게&nbsp;된다면 그것은 되려 간접민주주의에서&nbsp;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nbsp;뿐이다.&nbsp;집회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동등하게 반영되지 않고,&nbsp;집회에 참여한&nbsp;집단의 효과적으로 모아진 목소리에 정치권이 압박을 받아 결정을&nbsp;바꾸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주&nbsp;전형적인 간접민주주의의 모습이다. <br><br>되려 직접민주주의라면 집회를&nbsp;그렇게 많이 이용할 필요가 없고 법이 허용하는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을 이용해서 국가 중대사에 대한 결정을 국민이 하면 된다. 국민 한명 한명의 의사가 모두 동등하게 반영된다.&nbsp;간접민주주의에서는 다양한 이익집단, 혹은 다양한&nbsp;사회&nbsp;운동체들이&nbsp;정치권을&nbsp;다양한 방식으로 압박 혹은 설득하게 되고 이 압박과 설득에 성공한 집단의 의견이 반영된다. 이 압박의 방식엔 로비나 이권의 제공이 있을 수도 있지만, 또 거리의 집회와 자유언론의 선전도 사용된다.&nbsp;<br><br>현재 촛불집회의 정치 구호를&nbsp;안고가는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집단의 입장에선, 직접민주주의가 반드시 내편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nbsp;현 제도를 개혁하려는 과격한&nbsp;주장은 주로 20대 (그리고 투표권 없는 10대)의 지지를 자동으로 받기 마련이고, 30-50대는 사안에 따라 갈리는 반면, 60대 이상에서는 호응을 받기 힘들다. 30-50대가 평균 반반으로 갈린다 치면, 고령화에 의해서 결국 대중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이&nbsp;될 것이며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다. 즉, 사회를 운영하는 더 중요한 젊은&nbsp;구성원들의 목소리와 현직에서 떠난 뒷방 어른들의 목소리가 동등하게&nbsp;반영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젊은세력의 목소리는&nbsp;간접민주주의 제도를 통해&nbsp;더 강력한 비중으로 정치권에게 전달 된다.&nbsp;<br><br>현 시국에서,&nbsp;선거로 당선된 정치권을 젊은 세대가 거부하는 상황은, 선거를 노인들이 좌우하고 있다는 딜레마에서 비롯된&nbsp;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딜레마는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로 더 깊어질 수도 있다.&nbsp;대의정치의&nbsp;의의는 선거로 뽑은 정치가들이&nbsp;자신을 뽑은 사람을 대변한다는&nbsp;측면 이외에도 전문 정치인은 전문성을 가지고 정책과 법을 결정할 것이라는 기대에 있다.&nbsp;그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전문 정치인이라면, 새로운 미래를 잘 보지 못하는 노인들의 의사보다는&nbsp;사회를 이끌어가는 연령의 의사에 더 비중을 둘 것이다. 나아가서&nbsp;자격있는 정치인이라면&nbsp;인기에 영합하기 보다는 여러 의견중&nbsp;좀더 합리적인&nbsp;의견에&nbsp;좀 더 비중을 두어서 고려할 것이다. 간접민주주의는 정치인이 자신의 존재가 국민의 의사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기에 내 의견을&nbsp;반드시 신중하게 고려하지만,&nbsp;그러나 또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잘 따져보아&nbsp;나보다 현명한 결정을 해주기를&nbsp;바라는 그런 제도이다.&nbsp;간접민주주의의 대의정치는 그런면에서&nbsp;국민들이 정치라는 게임에 다양하게 참여할 융통성을 허용하며 그런 와중에 구성원 간의 의견 협의가 좀더&nbsp;활발하게 일어나게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부정적인 결과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nbsp;<br><br>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확대가 과연 현재 우리에게 적합한 방향인지 알아서 생각해 보시압.<br><br>: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정도는 긍정적으로 고려해&nbsp;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nbsp;그런 제도가 있다는 자체가 의원들에게 주는 상징적&nbsp;압박이,&nbsp;선거를 노인들이 좌우한다는 딜레마를 조금 덜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소환을 원하는&nbsp;비판적인&nbsp;쪽은 젊은 세력이기 마련이고, 그리고 소환의 가능성은 젊은 이들의 지역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지&nbsp;않을까 합니다.&nbsp;<br><br>: 노인들을&nbsp;무능력자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nbsp;노인들의 오랜 경험이&nbsp;되려 날카로운 직관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그 노인들의 의견이 너무&nbsp;강하게 정치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에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br>			 ]]> 
		</description>
		<category>왜냐면</category>
		<pubDate>Sun, 22 Jun 2008 01:56:14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선동의 추억 (3)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702121</link>
		<guid>http://egeria.egloos.com/1702121</guid>
		<description>
			<![CDATA[ 
  <p><br>1편은: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683400">선동의 추억 (1)</a><br>2편은: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690909">선동의 추억 (2)</a><br><br>여름방학이 끝난 후 기말고사와 함께 2학기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학교를 뒤흔들만한 시위를 했어도 학생들에게 여름방학은 '신나는 여름방학'이었지만,&nbsp;전교조 가입교사들, 파업 교사들의 처지는 폭풍을 맞아 이리로 저리로 떠밀리는 악몽같은 시간들이었다. 전원 해임 파면을 한다는 정부의 협박은 나중에는&nbsp;탈퇴 각서를 쓰면 선처해 준다는 비열한 회유책으로 변했다. 실제로 한 가정의 가장이 해직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탈퇴 각서 종용에 대해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은 각자 개인적인 선택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선생님들은 탈퇴 각서를 제출했다.&nbsp;<br><br>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징계문제는&nbsp;이미 정리가 끝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인 그런 상태였다. 서너 명의 선생님들은 이미 전보 처리 되었다. 나의 담임 선생님을 포함한 탈퇴 각서를 제출한 선생님들은 같은 식으로 전보 처리 될 수도 있고 남을 수도 있는 그런 불분명한 상태였다.&nbsp;중앙에서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몇몇 선생님들은 탈퇴 각서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차피 중징계를 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분들은 징계에 반발하면서 시간을 끌고 계셨기에 아직 학교에 나오고 계셨다.<br><br>그런데 나를 충격에 빠트린 건 우리에게 지구과학을 가르치던 송선생님이&nbsp;방학동안 해직되었다는 거였다. 송선생님은 젊은 유부남 선생님이었는데, 정치적 발언을 전혀 하지 않으시고 성격이 조용하신&nbsp;분이었다. 선생님이 얌전하고 순하면 아이들이&nbsp;산만해지기 쉬운데, 이 선생님은 조용하지만 아주 잘 짜여진 수업을 진행하셔서 지구과학이라는 재미있을리 없는 과목을 아이들이 꽤나 집중해서 잘 배우고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 처럼 지루함을 달래는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일도 거의 없던 분인데 한 번인가&nbsp;무슨 맥락인지&nbsp;자기가 왜 보신탕을 안먹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어릴 때 너무너무 사랑하던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나서 너무 슬퍼한 나머지, 혹시 그 강아지를 요리한 음식이 나올까봐 보신탕을 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자꾸 동료들이 회식으로 보신탕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한 번은 따라가서&nbsp;국물이나 한 번 떠먹어 볼까 했는데 갑자기 국물 사이에 강아지 눈깔 같은게 보여서 으아아악 하며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지금은 보신탕에 강아지 눈깔이 있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이야기는 내가 보신탕을 안먹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 듯 하다..)&nbsp;그렇게&nbsp;송선생님은 무척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송선생님은&nbsp;전교조의 주동세력도 아니었고 단지 전교조의 취지에 공감했던 건데,&nbsp;순수한 원칙주의자이기에 탈퇴 각서라는 정부의 치사한 접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탈퇴 각서를 내지도 않았고 징계에 맞서지도 않아서, 탈퇴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해임시킨다는 정부의 방침대로 제깍 해임되어 버린 것이다.&nbsp;<br><br>다른 두세명의&nbsp;선생님들이 나중에 파면과 해임을 당했는데, 이 선생님들은 학기 중에 징계를 맞기도 했고 또 평소에 아이들에게&nbsp;시대비판으로 인기도 끌어온 터라 꽤나 요란하게 학교를 떠났다.&nbsp;시위하는 우리들을 나무라시던, 중앙의 직책을 맡았던&nbsp;화학담당 이선생님은&nbsp;약간 엄한 편이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정치적 이야기들을 하시곤 했고 따라서 따르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분이 파면되고 떠나던 날 꽃다발을 가져다 드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해직 당한 국어 선생님이 떠나는 날에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음에도&nbsp;또 교문에 까지 나가서 울며 배웅했다.&nbsp;솔직히 나는 교사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교사들에게&nbsp;대한 기준이&nbsp;까탈스러운 편이었다. 물론 학교에서 전교조에 가입하신 교사들은 그렇지 않은 교사들과 비교해서 훨씬 좋은 선생님들이었다. 전교조 교사들 중에 주로 과학을 가르치시는 분들은&nbsp;학생들이 적극적으로&nbsp;참여하는 열린 수업으로 학교 내외로 유명한 분들도 많았는데, 나는 그 분들이 아이들이 열린 수업을&nbsp;할 수준이 안된다며 신경질을 내는 모습을 본다든지 뭔가 하나라도 꼬투리가 잡힌 경우엔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엑스를 그어 버리곤 했다. 심지어 우리반 아이들이 다&nbsp;존경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해서도 한 두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로 마음을 다 주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잘리는 게 너무너무 슬펐다.&nbsp;내 눈물은 개인적인 친분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뭔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었을까? <br><br>해임된 교사들의 후임으로 대기발령 중이던 교사들이 임용되었다. 나는 그 교사들이 너무너무 미웠다. 특히 송선생님을 대신해서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여자 선생님이-지선생님- 임용이 되었는데,&nbsp;이 선생님은 머리는 밝게 염색이 되어있고 화장은&nbsp;진하고 복장은 화려한 날나리 선생님이어서 첫 인상부터 좋지가 않았다.&nbsp;또 한번 나는 새로 임용된 교사들의 수업에 대한&nbsp;소극적 수업거부를 해야한다고 선동했다.&nbsp;수업거부 방침은&nbsp;학생회를 통해 또&nbsp;전교생에게 선전되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들어오시던 말던 다 책상에 업드려 있었다.&nbsp;지선생님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개인적인 감정은 없는데, 저희는 해직당한 선생님에 대한 예의로 선생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수업을 하지 않겠습니다." 지선생님은 그저 1시간을 때우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날을 우리는 수업거부를 했는데, 지선생님은 회유도 하고 그만하라고 화도 내시고 내가 무슨 죄냐고 한탄도 하시고&nbsp;그저 무시하고 진도도 나가보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미안해지면서 점점 수업을 듣게 되었다. 물론 나는 끝까지 고집을 피웠지만 말이다. <br><br>2학기는 또한 동생의 학생회가 임기를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징계와 관련한 이슈나&nbsp;그때그때 당면한 이슈에 대해 학생회는&nbsp;늘 선전하고 선동하고 뭔가를 조직하곤 했다.&nbsp;새벽같이 등교해서 각 교실 책상 서랍에 전단지 넣어두기, 화장실에 대자보 붙이기 등등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동생의 학생회는 잘 노는 일에도&nbsp;일가견이 있는 학생회였다. 학생회는 학교 축제를 다양한 아이디어들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를 했다. 제일 의미있었던 것은 음악 경연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해서 학생들이 노래나 밴드나 악기연주 등의 음악 장기자랑을 하고 시상을 하는 학교의 전통 행사를 만든 것이었다. 강당이 없는 학교인지라 커다란 트럭을 두대를 붙이고 그 위에 나무판을 깔아서 무대를 만드는 등,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학생회의 창의력과 조직력을 즐겁게 발휘했다.<br><br>전교조 선생님들은&nbsp;학생회 아이들이 기특하다고 이뻐했지만, 다른 소위 "어용" 선생님들에겐 눈에 가시였다.&nbsp;이중&nbsp;악질 음악선생님이 있었는데, 학생회들이 뭔가 일을 꾸미거나 잘못하는 것을&nbsp;찾아내서&nbsp;혼줄을 내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nbsp;학생회는 그래서 몇번 이나 음악선생님에게 '발각'이 되었다. 한 번은 일요일엔가 동생과 학생회 임원들이 친목도 다질겸&nbsp;의논도 할겸 학교 뒷산으로 소주인지 막걸리인지를 들고 가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학교에 나와있던 음악선생님이 산을 뒤져서 이들을 찾아낸 거였다.&nbsp;어떤날은 새벽에 화장실에 대자보를 붙이다가 또&nbsp;음악 선생님에게 발각이 되기도 했다.&nbsp;어머니는&nbsp;이런 일로 가끔 동생때문에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을 면담해야 했다.&nbsp;어머니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싫어했고 동생의 학생회 및 풍물반 활동을 싫어했기에 잔소리를 많이 하시긴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큰일날 일을 한다고도 생각지는 않으셨다. 동생의 문제로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사과는 하셨지만&nbsp;그렇다고 징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빌어야 할 상황은 오지 않았다. 동생은&nbsp;그 학년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여학생이었고 동생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남학생도 한두명 정도 밖에는 없었다.&nbsp;명문대 합격률을 신경쓰는 선생님들은 이 모든 불미스러운 일에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 동생을 학교에서 쫓아내기는 커녕&nbsp;징계 기록을 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학생들도 적당히&nbsp;설교만 듣는&nbsp;정도로&nbsp;이 일들을 무마할 수&nbsp;했다. 나중에 동생의 학생회 임기가 끝난 후에 독립적으로 대자보를 붙이다가 발각된 다른 여학생들이 거의 학교를 쫓겨날 뻔&nbsp;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차별하는지 확인했다.<br><br>동생의 학생회 임원들 대부분과 학생회장 박군은 제대로 사상학습까지 열심히 하는&nbsp;고교 운동권이었다. 박군은 학생운동에 열심인 대학생 형들을 두고 있었고, 다른 학생회 임원들은 뭔가 조직에 속해있었다. 학생회는 당면한 일들을 의논하기도 했지만,&nbsp;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도 열심히 했다. 해직된&nbsp;근방의&nbsp;몇몇&nbsp;학교 선생님들이 동네에 서점을 하나 차리셨는데, 그 서점에는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방이 있었다. 이 비밀방에서&nbsp;학생회는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없이 모임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그날의 침묵시위 사건 이후로&nbsp;이 운동이라는 것에&nbsp;대한&nbsp;어떤 불신이 생겼다.&nbsp;광장의 힘을 맛본&nbsp;군중은 애초에 타락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nbsp;학생회가 지향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이런 군중의 힘을 에너지로 사용해서 이상을 이루겠다는 건데,&nbsp;사회주의 혁명이 아무리 고고한 이상이라고 한들,&nbsp;선천적으로 타락을 피할 수 없는 군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건 내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였다. 나의 이런 삐딱한 관점은 동생에게도 당연히 전해졌고&nbsp;동생은 사상적으로 다른 학생회 임원들과 조금 거리를 두었다. 동생은 친구들이 자기를 "중도파"로 부른다며 씁쓸하게 농담을 하고는&nbsp;했는데, 이후로 학생회가 좀더 과격한 선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동생은&nbsp;그걸 적당히 말리는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와 동생은 우리가 그래도 "중도좌파"쯤은 되길 바랬고, 학생회 친구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었다.&nbsp;학교를 짤리는 일을 당할 위험이 있어도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nbsp;행동하는 그런 아이들을 다른 겁장이들과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nbsp;당시&nbsp;우리들에게 공공의 적&nbsp;중에 하나는 동생 학년의 용식이라는 남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선생님들한테 늘 아부하고 학생회의 수상한&nbsp;행동들을 일러바치곤 했다. 그 남학생의 별명은 곧 '어용식', '프락치'가 되었고, 우리는 그녀석이 미워 죽었다. 이 남학생은 결국 일부러&nbsp;다음해의 학생회장후보로 출마해서 학생회장이 되고 말았다. 용식이의 학생회 시절에 동생의 운동권 그룹은 뭐하나 움직거리려고만 해도 무지하게 투쟁해야 했다.&nbsp;동생은 용식이를 찾아가 키 큰 용식이에게 고개를 꽂꽂이 들고 따지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용식이는 동생에게 꼼짝을 못했다. 사실 용식이는&nbsp;학생의 본분이라던지 부모님이 가르치는&nbsp;보수주의에 경도된 앞뒤가 답답한 친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악질은 아니었고, 원칙을 들어 따져대는 동생의 요구를 조금씩은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nbsp;<br><br>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학교는 그렇게 뭔가 이슈를 만들어 이것저것 학교에 분란을 일으키는 운동권 학생들로 인해 심심치 않은 시절을 보냈다. 학생회장 후보 성적제한 철폐를 위한 종이비행기 데모를 통해, 학생회장 후보 성적제한을 철폐해주는 것으로&nbsp;동생은 후배들에게 어용 용식이 같은 아이가 아닌&nbsp;괜찮은 학생회장을 물려주고는 졸업을 했다. 그 이후로도 남아있는 동아리들과 선생님들로 인해 고교운동권의 명맥이 얼마동안은 유지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등장했던 인물들의 고등학교 시절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br><br>동생은 3학년에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결국 선지원제도 대학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고등학교시절 학생회며 동아리 활동 탓을 많이 하셨고 동생은 풀이 많이 죽었다. 재수생활을 거친후에도 동생은 원하는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했는데, 그 동안 동생은 진지하고 똘방한 짧은 머리 운동권 여학생에서 긴생머리 미니스커트 보라색립스틱의 멋부리는 여대생으로 대변신을 하고야 말았다. 대학교에서 운동권은 근처도 가지 않았을 뿐더러, 학교공부-남자친구-나이트가서 놀기의 삼박자 이상으로는 절대 아무것도 하지&nbsp;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시절의 동생이 못마땅한 만큼이나, 새벽3시에 귀가하는 동생때문에 속을 끓이셔야 했다.&nbsp;물론 지금 동생은 얌전한 아이엄마가 되었지만...<br><br>학생회장 박군은 동생과 같은 대학교를 다녔는데, 여전히 열렬한 PD계열 운동권으로 명성을 날렸다. 동생은 학교에서 박군과 가끔 마주치곤&nbsp;했는데, 당시 대학생 패션에서도 한참 첨단을 더 나가는 학교에서도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쳤던 동생을 바라보며 과연 박군은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br><br>어용 용식이는 예상대로 명문대에 입학을 해서는 3년만에 조기졸업을 하고 유학을 가버렸다. 그 후로 소식을 듣지는 못했는데,&nbsp;전공이&nbsp;공부는 어렵고 취직은 안되는 과목이다 보니,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혹은 일찍 유학을 간&nbsp;탓에 군대를 피하느라 영영 한국에는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br><br>송선생님은&nbsp;거의 10년이나 흘러서&nbsp;복직이 되셨다. 가끔 캠퍼스에는&nbsp;전교조 해직교사 복직을 촉구하는 게시물이 붙어있곤&nbsp;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송선생님의 이름을&nbsp;확인하고는 가슴이 아팠다. 송선생님은 복직되기 전까지&nbsp;학원에서 가르치셨다고 간신히 수소문해서 들을 수 있었다. 어찌어찌 전교조의 윗선에까지 문의를 해서 송선생님의 복직을 확인하고서야 나는&nbsp;그동안 가슴한켠에 묵직하게 남아있던 걱정을 덜 수 있었다.<br><br>다른 전교조 선생님들은 합법화가 될 때까지 계속 열심히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선생님들을 찾아뵙거나 하는&nbsp;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교조는 합법화가 되었지만 이미지 메이킹에서&nbsp;여전히 성공적이지 않고 꼴통이나 이상한 선생님들도 끌어않고 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아이들에게 정성을&nbsp;다하는 멋진 선생님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을 여러번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nbsp;&nbsp;&nbsp;&nbsp;<br><br>악질 음악선생님은 우리가 모두 졸업한 이후에 수업시간에 어떤 아이에게 인격적으로 심히 모욕을 주며 때리다가, 화난 그 남학생이 되려 선생님에게 주먹을 날리는 사건이 있었다. 음악선생님은 그렇게 일종의 망신을 당했는데, 그 남학생은 결국 학교를 쫓겨났지만 음악선생님도 그 이후로는 조심한다고 전해 들었다. <br><br>결국 세월이 오래 흘러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갈길을 가고 선생님들도 회복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다. 학생회 임원이나 학교의 운동권 동아리 아이들 중에는 혁명의 사상에 심취해서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공장으로 취직해서 노동운동 등에 뛰어든 아이들이 몇명 있었던 것이다.&nbsp;묘하게도 이 아이들은 모두 여학생이었다. 물론 당시에 대학의 문은 더 좁았고, 나의 친한 친구같은 경우에는 대학가기도 어려운 겸, 겸사겸사 인맥에 엮여 빈민운동으로 뛰어들어서 그렇게 인생의 방향을 잡은 경우도 있었지만, 동생의 두어명의 친구들은 상당히 똘똘한 아이들이었지만 대학을 기꺼이 포기했다. 안타깝게도 그 중 한 아이는 졸업한지 3-4년이 지나지 않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br><br>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많은 당시의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격변기였다. 한동안 나는 그 격변기가 남긴 감정에 몰두해서&nbsp;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동정하고 선한편과 악한편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nbsp;삶의 궤적은 단순한 기준들로 분류되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가 특별한 자취라는 생각이 든다. 그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소중하다는 것,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더이상 평가하지 않게된 것은 많은&nbsp;사람과 많은 일을 겪은 나이 먹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평온함인지도&nbsp;모르지만 말이다.&nbsp;<br></p>			 ]]> 
		</description>
		<category>About Rudy</category>
		<pubDate>Wed, 14 May 2008 19:13:53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선동의 추억 (2)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690909</link>
		<guid>http://egeria.egloos.com/1690909</guid>
		<description>
			<![CDATA[ 
  1편은 요기: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683400">선동의 추억 (1)</a><br />
<br />
선동의 추억 (2)<br />
<br />
그 해 5월 말 경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그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학교 선생님들이 무슨 말을 해서가 아니고, 티비와 신문에 들썩들썩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티비와 신문에서는 교사는 성직이고 노동자가 아니라며 비난하다가 결국 불법으로 결론내리고 말았다. 전교조는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즉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밤에는 교무실에서 일종의 농성 같은 것을 하면서 단식중임을 알리는 그런 식이었다. 이쯤 되자, 우리는 어떤 선생님이 전교조에 가입했는지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우리학교에는 무려 27명, 삼분의 일가량의 선생님이 전교조에 가입해 있었다. 이 선생님들 중, 평소에 정치평론을 많이 하는 몇명의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전교조와 관련해서 뭔가 코멘트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생님은 아이들을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작정으로 입을 다물고 계셨다. 정부와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단식농성은 교사들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때 선생님들은 육체적으로 수업을 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있기도 했다. <br />
<br />
정부는 곧 극단적인 조치를 내리기로 하고, 파업교사들을 파면, 해직하겠다고 공표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실 전교조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사소통이 되고 있지 않았다. 교사들 입장에선 안그래도 불리한 대외 이미지에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티비에서 파면을 떠들어 대는데, 우리학교는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30명 가까이나 되는 젊은 선생님들이 다 짤리게 생긴 것 같으니, 우리들은 패닉상태가 된 것이다.&nbsp;<br />
<br />
학생시위는 사실 내 의견이었다. 즉, 동생의 측근들 쪽에서 먼저 나온 제안이었다. 회장 후보 당선자 박군의 경우에도 비슷한 기획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선생님들의 파면을 반대하는 운동장 침묵시위를&nbsp;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박군의 그룹과&nbsp;계획을 짜기 시작했다.&nbsp;날짜와 시간을 정했고, 시위의 방법을 정했다. 조직 방법은 간단했다. 각 학급에 연락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연락책에게는&nbsp;임무가 맡겨졌다. 00일 2교시가 끝난 후 운동장에서 침묵시위가 있다는 걸 자기반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알린다는 것, 절대 침묵 시위를 지킬 것, 운동장에서는 평소 조회 시간에 서는 각 학급의 자리대로 정렬할 것, 그리고 연락책은 2교시가 끝났을 때 교실 앞에 나와서 지금 시위가 시작되니 참가할 사람은 운동장으로 나오라는고 선전할 것. 침묵시위는 차기 학생회가 생각한 아이디어였지만, 엄연한 현 학생회가 임기 중이었기에 우리는&nbsp;현 학생회를 접촉해서 대표성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학생회장은 올빼미&nbsp; 안경을 쓴 모범생 3학년이었다. 학생회장은&nbsp;고민하며 주저하다 그러겠다고 했다.그리고 3학년은 시위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만약 어떤 불이익이 생긴다면 3학년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br />
<br />
드디어 디데이, 2교시가 곧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며칠 전에 우리반 반장 여학생에게 우리반의 시위 대열의 대표직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나는 당시 부반장이었고, 반장을 맡은 여학생은 나의 오랜 초등학교 시절부터의 친구 정양이었다. 이 친구는 활발하고 발표도 잘하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마음도 따뜻한 아이였다. 그렇지만&nbsp;정양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고지식한 성격탓에 며칠동안 심하게 고민한 정양은, 반장이라는 자신의 책임으로 볼때 시위나 수업거부를 주동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nbsp;나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리고 대신 내가 대표직을 맡기로 했다. 2교시가 끝나고&nbsp;아이들이 서로 쳐다보고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교실 앞으로 나갔다.&nbsp;<br />
<br />
"얘들아. 할말이 있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담임선생님 지금&nbsp;파업중이시고 단식 중이시지."<br />
<br />
우리 담임 선생님은 40살에 가까운 수학을 가르치는 여선생님으로, 당시 전교조 멤버중엔&nbsp;상당히 노땅에 속했고, 따라서 존경을 한몸에 받는 분이셨다. 파업으로 인해, 담임 업무는 반장이나 나를 불러서 미니멈으로 전달하고 계셨고, 우린 나날이 수척해 가는 선생님을 지켜보고 있었다.&nbsp;<br />
<br />
"선생님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nbsp;문교부가 위법이라고 하고 잘못이라고&nbsp;해서 너희들도 혼란스러울 것이고, 나도 뭐가 맞는다고 딱 주장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이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든. 27명의 우리가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지금 파업하시고 단식하시는 이유는 "참교육"을&nbsp;실행하겠다는 일념에서라는 거야.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지금 선생님들이 파업하시고 단식을 하시는 거라구.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강제 자율학습이며 보충수업이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감옥에&nbsp;갇힌 것처럼&nbsp;살고 있고, 생생한 배움이 아닌&nbsp;다 죽은 지식을 딱딱하게 암기만 하고 있는 것, 너희들도 뭔가 너무 잘못되고 있다고 느껴왔잖아?&nbsp;선생님들께서&nbsp;그걸 바꿔보시겠다는데 그래서 단체를 만들었는데 정부에서는 듣지도 않고 탄압만 하고 있어."<br />
<br />
당시 전교조의&nbsp;교사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가 있다는 호소는 씨알도 안먹히고 있었다.&nbsp;그래서 부각된 것은 "참교육"이었다. 나는 물론 교사에게 노동조합결사의 자유가 있음을 분명히 믿고 있었지만,&nbsp;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nbsp;&nbsp;<br />
<br />
"무엇보다도, 이제&nbsp;문교부에서 파업에 참가한 교사들을 다 파면하기로 했데. 선생님들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때문에 이제 짤리시게 됬어. 나는 우리가 이렇게 수업거부를 하고 시위를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 하지만, 우리 선생님들에게 우리 마음을 보여드리지 않은채 선생님들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정부가 선생님들을 파면하려고 하니,&nbsp;우리는 선생님들을 파면하지 말라고&nbsp;우리 의사를 표현하는 이것, 이것밖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그러니 우리 선생님을 파면하지 말아달라고 전달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 운동장으로 나가자.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이대로 보낼 순 없잖아?"<br />
<br />
감성을 자극한 내 선동은 성공적이 었고,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운동장으로&nbsp;나가기 위해 일어섰다.&nbsp;서너명이 남았다. 남은 아이들 중엔 여호와의 증인인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nbsp;정치적 참여를 터부시하는 종교에 가르침 때문에 남아있었다.&nbsp;그런데 반장인 정양은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정양은 남아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 순간엔 정양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nbsp;반장인 정양이 남아있었기에&nbsp;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마 소외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br />
<br />
운동장에는 정말 많은 아이들이 나와있었다. 물론 각&nbsp;학급의&nbsp;시위 참여도는&nbsp;연락책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80%정도의 아이들이 나와서 조회 대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침묵시위를 한다는 지시대로 아이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날따라 분위기도 맞게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우리는 비를 쫄딱 맞고 있어야 했다. <br />
<br />
그런데, 대표를 맞기로 한 3학년 학생회장이 한구석에서 차기 학생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자기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거였다. 학생회장이 조회대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끌기로 했었는데 말이다. 곧 3학년 학생회장은 뒤돌아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차기 학생회장 박군은 마이크를 잡고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br />
<br />
"여러분, 차기 학생회장 박00입니다."<br />
<br />
박군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렸다. 아이들은 신이나서 크게 환호했다. 우린 침묵시위를 하기로 했는데 말이다. 여기저기서 다시 쉬쉬 거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박군은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한마디 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는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된 스타였고, 무엇보다 대단한 연설가였다.&nbsp;조용히 하자는 소리는 점점 묻히기 시작했다. 이쯤 진행 되었을 때,&nbsp;전교조 선생님들 중 학교의 대표이고 또 실제 중앙에서 주요직책을 맡고 있던&nbsp;화학을 가르치는 이선생님이&nbsp;단상에 나왔다. 아이들은 마구 환호하기도 하고 선생님을 짜르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이선생님은 그러나 아이들에게 심각하게 화를 내었다. "너희들이 이러는 거 우리들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걸 아느냐"는게 요지였다. 우리들은 움찔했다. 그러나 박군은 "우리는 선생님들에게 징계가 되지 않는게 확인 될 때까지 계속 수업거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많은 아이들은 박군의&nbsp;의견에&nbsp;박수를 보냈다.&nbsp;<br />
<br />
이때 나는 점점 화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nbsp;침묵시위라는 시위의 방법은 학생 시위와 수업거부가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위해 주의깊게 선택된 전략이었다. 당시에 여론은 전교조를 불법좌경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기에,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폭력성을 띠거나 무질서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 비난은 다시 고스란히 전교조 교사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위해서라는 원래 시위의 취지는 잊은채, 그저 시위하는 재미를 발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기 학생회장 박군은 선생님들을 위해 정부나 여론의 눈밖에 심히 벗어나느냐 아니냐를 눈치보는 나와는&nbsp;다른&nbsp;명분을 이 시위에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박군의 선동력에 따라 아이들은 점점 들썩 거리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구호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담은 "시험거부! 시험거부!"&nbsp;라는 산발적인 외침에까지 변해갔다. 우리는&nbsp;곧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거부라는 외침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저 시험보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이기적인 바램에 불과했다. 시위하는 아이들은 광장에 모인 군중의 힘을 점점 느끼고 잇었다. 간혹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몇몇 놀란 학부모들이 대열에서 자기 아이를 끌어내서 집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교장선생님의 삿대질과 외침, 학생주임이 막대기를 들고 설치는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힘이 주어진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br />
<br />
나는 모든게 역겨워 졌다. 게다가 전교조 이선생님이 거의 눈물을 흘리다 시피 그만하기를 종용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침묵시위이던 아니던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전교조의 대외적 이미지에는 그야말로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선생님들이 우리를 원망하기 보다는 기특하다고 여긴 것은 맞지만 말이다.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리며 꿇어 앉아있던 시위대열이 손을 내지르고 환호를 지르며 낄낄대는 'Mob'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참을 수 없던 나는, '침묵 시위 해야합니다'를 몇번 소용없이 외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nbsp;군중을 확인하고, 우리반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들어가자" <br />
<br />
우리반 아이들 중 이 시위가 너무 즐거운 열 대명 가량의 아이들은 남아있었지만, 나머지는 다시 나를 따라 교실로 들어왔다.&nbsp;교실에서 반장인 정양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정양은 그러자, 아직 운동장에 아이들이 남아 있다면 자기는 지금 나가서 그 아이들과 같이 있겠다고 거꾸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 당시엔 정양의 사고방식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지금에는 정양이 자신의 임무를 학급 아이들의 보호를 최선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nbsp;있다. 그러나 나는 수업 안하고 운동장에서 소리지르고 있는게 즐거워 남아있는 평소에 까불까불하던 오양 류의 아이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반장인 정양과 선동가인&nbsp;나 중에 누가 더 이타적인 사람이고 누가 더 자기 이상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련다. &nbsp;<br />
<br />
차기학생회가 대표성을 가지고&nbsp;이끄는 학생&nbsp;시위와 수업거부는 이튿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물론 내 동생은 나와 달리 의무가 있었기에 여전히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 시위 참가자의 숫자는 조금씩 줄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1,2학년의&nbsp;50% 가량의 아이들은 계속 참여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압박용으로 수업을 계속하면서 자리에 없는 아이들의 출석을 체크하고 결시처리 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출석체크를 하려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는데 (삼분의 일은 파업중이라 수업이 되지 않았고, 나머지 선생님들도&nbsp;아이들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해서였다. ) 나이 지긋하신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셔서는 출석을 체크하겠다고 하셨다. 영어 선생님은 무서운 분은 아니었지만 지루하고 심드렁한 그런 분이었다. 영어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자, 나는 교실 앞으로 뛰어가서 선생님 앞에서 출석부를 낚아 채버렸다. "선생님, 저희들보고 친구들을 배신하란 말인가요? 선생님으로서 그렇게 가르치실 건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저희 다 결시 처리하십시요. 저희 다시 나가겠습니다. 얘들아 나가자!". 아이들은 출석부를 옆구리에 끼고 복도로 나가는 나를 좇아서&nbsp;다시 우르르 몰려 나오고&nbsp;있었다. 당황한 영어 선생님은 헐레벌떡 쫓아 와서는 내게 "잘못했다. 출석 안부를께. 교실로 들어가자"며 &nbsp;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다시 멈춰서 아이들과 교실로 들어갔고 대신 출석부는 여전히 옆구리에 끼고 수업을 했다. <br />
<br />
시위와 수업거부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 결국 주말을 맞은 학교는 그 사이에 휴교조치를 취했다. 기말고사는 개학이후로 미뤄졌고, 학생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전경들의 닭장차 세대 정도가 교문을 막아 버렸다. 당시 학생 시위로 휴교를 당한 학교가 서울시내에 몇군데 더 있었기에, 우리학교는 뉴스를 타는 영광은 아주 작게만 누렸을 뿐이다. 구로구 쪽에 고등학교는 훨씬 강렬하게 시위를 했는데, 나중에 대학교에서 그 학교 출신을 같은 과에서 몇명이나 만나는 통에 잠시 추억을 교환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방학은 시작되었고, 선생님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로 우리는 긴 여름을 맞이했다. <br />
<br />
(3편은: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702121">선동의 추억 (3)</a>)<br />
<br />
<br />
			 ]]> 
		</description>
		<category>About Rudy</category>
		<pubDate>Sat, 10 May 2008 18:45:26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선동의 추억 (1)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683400</link>
		<guid>http://egeria.egloos.com/1683400</guid>
		<description>
			<![CDATA[ 
  <p>처음 선전에&nbsp;참여한 것은&nbsp;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학년 아래의 여동생이 전교 학생회 부회장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홍보라기 보다는 선전 내지 선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생의 선거 운동, 그리고 동생이 출마한 당시 우리 학교의 선거전이 전교조 세대에 일어난 고교 학생운동의&nbsp;한 장면을 장식할 일련의 사건들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어서이다. 퇴색한 기억이고, 주변부에서 겪은 일이니 만큼, 역사라기 보다는 사적인 추억이 될 것이다. <br />
<br />
동생은 보이쉬한 짧은 머리에 똘똘하고 야무진 얼굴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nbsp;남녀공학의 1학년 여학생이었다. 나의 부추김과 측근의 부추김에 동생은 다가오는 2학기 부터 1년동안 부회장을 맡을 1학년생으로 출마했다.&nbsp;2학년이 회장을, 1학년이 부회장을 맞고 2학년 회장이 3학년 1학기가 될 때까지 임기를 맡는 제도 였다. 80년대 후반의 남녀공학 고등학교의 학생회는 아직 남학생 일색이기 일쑤였으나, 아무리 봐도 똘똘한 동생은 정녕&nbsp;1 학년의 대표,&nbsp;학생회 부회장 감이었다.&nbsp;<br />
<br />
동생의 선거&nbsp;운동 본부는 열명 남짓한 측근으로 이루어졌다. 동생의 어릴적&nbsp;친구들이자 중학교 동창들, 동생이 활동하는 풍물반의 친구들, 그리고 나 이렇게 이루어져있었다. 동생의 중학교 동창들은 그 학교의 '과학반'이라는 동아리 출신들이었는데, 이 과학반은 아직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곧 전교조의 핵심을 꾸릴 교사들이 똘똘한 학생들을 추려 모아서, '참교육'을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nbsp;교사들은 아이들이 여러가지&nbsp;생생한 과학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nbsp;대체로 NL&nbsp;계열의 대학 신입생 꺼리 정도의 책들을 읽도록 권했고,&nbsp;운동가요 테입을 복사해 주었고, 당시에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은 PC를 구입해서 아이들이 컴퓨터에 대해 배울 기회를 주기도 했고,&nbsp;의식화(?) 된 학생들이 쓴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 시집 같은 걸 읽고 또 비슷하게 글을 쓰는 뭐 그런&nbsp;활동들을 했다.&nbsp;동생과 동생의 친구들 대부분은 일종의 새로운 지식을 담는 기회로&nbsp;상당히 명랑하게 과학반 활동을 했고, 굉장히 창의적인 아이들이 되었다. 동생이 고등학교에서 가입한 풍물반은&nbsp;우리 학교의 두 운동권 동아리 중 하나여서, 풍물반의 친구들 역시 운동권으로 분류되었다.&nbsp;그리고 나는 동생과 다른 중학교를 다녔지만, 동생을 통해 같은 자료를 공유하는 바람에&nbsp;독립적으로 의식화되어 버려서 내가 다닌 중학교의&nbsp;(미래의) 전교조 교사들을 깜짝 놀래킨 (즉, 교육도 안시켰는데 이런 애가 있다니...이런)&nbsp;그런&nbsp;경력을 가지고 있었다.&nbsp;즉, 동생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사실 알 건 다 알지만, 어떤 범학교 조직에 속해있지 않고, 상당히 명랑한 동기를 가진 그런 아이들이었다. (아마 풍물반의 몇몇은 범학교 조직이나 성인 운동권 조직과 관련이 있었을 수도 있다.)<br />
<br />
우리는 열성적으로 선거를 기획했다. 나는 동생의 마스코트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홍보전단과 포스터를 제작했다. 동생의 마스코트는 동생처럼 주근깨가 그려진 개미였다.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 기호 1번 XXX! 뭐 이런 류의 구호도 만들었다.&nbsp;음악에 재주있는 다른 친구는 어떤 노래를 개사해서 홍보용 노래를 만들었다.&nbsp;진지하면서도 호소력있는 공약을 구상했는데&nbsp;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치성도 없었고, 반항적이지도 않았고, 너무 거창하지도 않았고, 상당히 건설적인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선거기간에 새벽같이 학교에 가, 등교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구호를 외치고 홍보전단을 나누어 주었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각 학급을 돌며 유세를 했다. 일단 교실에 들어서자말자 홍보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부르고는, (남학생 반에서 이건 사실 상당히 쪽팔린 활동이었지만 동생의 친구들은 아주아주 용감했다) 동생은 낭랑하게 준비한 연설을 했다. 그런데&nbsp;들뜬 어떤 학생들이&nbsp;노래! 노래! 를 외치기 시작했다. 동생은&nbsp;빼지 않고 이문세의 소녀를 무반주로 (당연히!) 주욱 뽑았다. 동생은 노래를 꽤 잘했다. 이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결국 동생은 모든 교실 유세에서 똑같은 노래를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동생을 이번 선거의 스타로 만들었다. <br />
<br />
동생의 경쟁 상대는 공교롭게도 나의 옆반 친구의 남동생이었다. 이 남학생은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한 아이였는데, 그 아이에겐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남학생들은 여학생이 학생회 임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여학생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부회장 후보의 언니/누나들이 2학년이라는 것은 묘한 상황을 가져 왔다. 1학년 학생들이야 서로 누구를 더 잘아느냐에 좌우되는 건 당연하지만, 2학년 학생들은 이번엔 과연 두 언니/누나들 중 누구와 더 친하냐가 중요한 관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동네 토박이였고, 상당수의 우리 학년 친구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언제 한 번은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들이었다.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같은 반이던 남학생과 복도에서 마주친다. "야, 니 동생이 부회장 나온 걔라며? 기호 1번?" 그럴 경우 나는 당연하게, "어, 너 꼭 찍어, 알았지!!!!!" 뭐 그보다 더 강력하게&nbsp;내가 아는 모든 아이들에게 동생을 찍을 것을 부탁했고, 그 아이들에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동생을 찍으로 설득할 것 까지 당부했다.&nbsp;결국 나중에 그 남학생 후보의 누나도 2학년 교실을 돌면서 앞에서.. "얘들아, 내 동생이 부회장 선거 나왔으니까 꼭 찍어줘~" 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낯선이가 교실 앞에서 뜬금없이하는 부탁과 친한 친구가 "야, 꼭찍어~" 라고 점조직으로 하는 부탁 가운데서 고등학교라는 사회에&nbsp;어떤 것이 더 설득력이 클 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br />
<br />
동생은 특히 2,3학년 남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귀여운 1학년 여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와 노래도 하고 율동도 하고, 당시에는 게다가 보이쉬한 스타일이 인기도 많았던 것이다! 동생의 선거운동은 요란했고, 동생은 각종 유세(교실 유세, 방송 유세, 운동장 유세)에서도 훨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렇게 동생은 유력한 부회장 후보가 되었고, 선거는 거의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br />
<br />
그렇다면 과연 선거 상으로는 더 중요한 회장 후보들의 선거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을까? 그것은 학교 규칙에 정해진 선거 운동 기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학교를 들썩거리게 하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등교한 전교생들은 다 운동장을 내다 보며 쑥덕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꽉차도록 물을 이용해 또박또박 쓰여진 것은 어떤 2학년 남학생의 이름 이었다. 아이들은 누군가 무슨 장난을 하는 건지, 그리고 그 남학생이 도대체 누구인건지, 술렁거렸다. 그런데 이 일은 다음 날 아침에도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날인가, 거기엔 후보의 기호번호가 붙어 버렸고, 학생들은 그게 바로 회장 후보의 출마한 박군의 홍보전임을 알게 되었다. 심심한 학교의 일상에서 이런 일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br />
<br />
회장 후보에 출마한 박군은 또다른 운동권 동아리인 교지편집부 출신이었다. 되짚어 생각해 보면, 이 교지편집부는 일종의 PD계열의 운동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박군은 이미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상당한 입문과정을 이미 거친 운동권 학생이었다. 박군의 학생회장 선거 운동은 우리의 그것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운동장에 이름 새기기 아이디어도 그랬지만, 박군의 홍보 포스터는 어느 대학교의 형 누나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박군이 운동장 선거 유세를 할 때는, 갑자기 4층 교실에서 부터 구호가 적혀진 4층 높이의 깃발이 주르르 내려왔다. 이 깃발은 물론 역시 대학생 형 누나들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보수적인 학생주임이 이런 유래없는 선거 운동에 대해 뒤늦게 선거법 위반이라며 삿대질을 했지만, 이미 목격한 아이들에겐 눈에 별이 반짝이고 흥분으로 가득찬 신나는 기억이었다. 게다가 박군은 비록 얼굴은 산도둑 같이 생겼지만 굵고 맑은 목소리를 가진 정말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br />
<br />
동생의 선거운동은 박군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생의 측근들은 일종의 이 사회에 역사적으로 어떤 부조리가 있었는지를 배운 정도로 의식화가 된 것이라면, 박군의 측근들은 아예 그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한 단계 더 앞선 친구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아무런 사전 조율 없이 독립적으로 선거에 뛰어들었고, 둘 다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이무렵 박군 측에서 동생을 접촉해 왔다. 요약하자면 이런 제안이었다. "학생회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선거 자체가 러닝메이트가 되어야 한다. 러닝메이트는 내년에 우리가 학생회가 되었을 때&nbsp;관철하겠지만, 아예 운동 과정에서 우리가 러닝메이트임을 표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즉 학생들에게 부회장 후보인 동생과 회장 후보인 박군은 한 팀이므로 이 둘을 함께 찍어 달라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좋은 생각으로 여겨 찬성했고, 결국 선거에서 두 사람 다 당선 되었다. 일종의 정당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당시 우리는 이 정당이 표방하는게 뭐가 되는 건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였다.<br />
<br />
선거 운동을 하는 내내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당선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건 오직 동생이 가장 훌륭한 부회장 감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이 선거는&nbsp;사명감 보다는 즐거운 운동 경기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온갖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방법들 - 시각적 효과들, 음악의 선동, 웅변술, 다단계 점조직, 이미지 만들어 내기,&nbsp;연합의 시너지 효과&nbsp;-&nbsp;을 다 동원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재주를 뽐낸 것이었다. 박군측의 재주는 우리와 차원이 달랐지만, 과연 박군의 마음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된 차기 학생회는 아직 2학기를 맞아 임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된다....<br />
<br />
(2편은: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690909">선동의 추억 (2)</a>)<br />
(3편은: <a title="" href="http://egeria.egloos.com/1702121">선동의 추억 (3)</a>)<br />
<br />
nbsp;&nbsp;<br />
</p>			 ]]> 
		</description>
		<category>About Rudy</category>
		<pubDate>Thu, 08 May 2008 04:10:35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시민의 과학적 소양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677228</link>
		<guid>http://egeria.egloos.com/1677228</guid>
		<description>
			<![CDATA[ 
  <p>민주적 의사결정의 과정이 가장 실용적인 결과를&nbsp;생산하려면 높은 수준의&nbsp;시민의 소양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은 산업화 시대에서 고도의 전문가의 영역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과학적 지식의 성격과&nbsp;내용의 기본 얼개를 이해한다는 의미의 과학적 소양은 민주사회의 시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다. 시민은 끊임없이 건강의 문제, 기술과 산업의 문제, 경제의 문제에 대한&nbsp;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nbsp;시민들의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경우&nbsp;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은&nbsp;정치와 사상, 수사와 선동의&nbsp;영역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 사안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사회 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상의 다양한&nbsp;스펙트럼 가운데&nbsp;누구든지 동의하는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마치&nbsp;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라면,&nbsp;사안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모두가 이해하는 하나의 언어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nbsp;어떤 가치관과 선험적 판단이 옳은 것인지&nbsp;아무도&nbsp;증명할 수 없지만,&nbsp;만약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가치관에 근거한 전략과 판단은 대체로 과학적인 정보로 번역될 수 있다.&nbsp;물론, 모든 미세한 뉘앙스와 개인적 경험이 모두 과학적인 정보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의사결정의 기반을 두기에는 충분하다. 과학적 정보는&nbsp;마치 운동경기의 심판관처럼,&nbsp;사회가 당면한 갈등이 물리적 충돌이 아닌 감당할 만한 경쟁의 수준에 머무를 수&nbsp;있게 조정하는&nbsp;제도로 기능을 할 수 있다.&nbsp;<br><br>시민의 과학적 소양이란 단순히 시민들이 과학의 과목을&nbsp;많이 배우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 다음과 같은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nbsp;<br>1. 개인에 관련된&nbsp;의사 결정에서 과학적일 것<br>2. 과학적 정보에 기반을 두고&nbsp;정치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nbsp;<br>3.&nbsp;정치적 갈등이 생길 경우&nbsp;과학적인 방식으로 해결을 노력하는 것<br><br>시민교육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물론 이 세 가지가 어떤 정도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nbsp;필요한 건지&nbsp;구체적인 항목들이 구성되어야 하겠지만, 이 글의 목표는 누구를 계몽하려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현재를 잠시 진단해 보려는 것이니만큼&nbsp;일단은 열린 문제로 남겨둔다. 다만, 현재를 진단한다는 의미에서, 최근의 미국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을 둘러싼 논란 및 정치 행위를 시민의 과학적 소양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nbsp;&nbsp;<br><br>이번 사태에서 미국 소고기 수입 문제와 광우병에 관해&nbsp;많은 루머가 양산되었고, 또 개인들이 치밀하게 과학적이라기보다는&nbsp;제한되거나 왜곡된 정보에 쉽게 호도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nbsp;루머나 선동적으로 과장된 정보들은 대체로 과학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잘못된 수치와 불완전한 해석이 떠돌았음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nbsp;측정된 값과 확률과 인과관계였다. 다만,&nbsp;많은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과학이란 형태로 포장된 요약된 정보를 접했을 때에는 반드시 출처(reference)를&nbsp;통해 재확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면에서의&nbsp;과학적 소양이었다. 과학적 지식은 경험 증거와 그 전문적 내용을 이해하는 다른 과학자들의 보증을 통해 공인된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을 접할 때 출처 및 보증하는 기관의 권위를 확인하는 것은&nbsp;그 결론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매우 중요하며, 과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일종의 태도가 된다.&nbsp;물론 나는 여기서 일반 시민들이 어려운 논문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적이라는&nbsp;것이 아니다.&nbsp;"<u>근거나 설명은 삭제된 채&nbsp;과학의 포장을 입은 정보를 접했을&nbsp;때 자동적인&nbsp;의심을 품고 정보제공자에게 근거를 요구하는"</u>&nbsp;그런 정도의 과학적 소양 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nbsp;물론 이것은 아쉬움이지 비난은 아니며, 더 큰 비난은 "<u>남에게 전달할 때는 혹시 모르니 더 철저하게 근거를 검토하는</u>" 정보제공자들에게 돌아가야&nbsp;할 것이며, 여기서&nbsp;개인보다&nbsp;언론과 정치집단에 향한 것은 더 큰 무게를 싣고 싶다. 물론 언론과 정치집단의&nbsp;과학적 소양은 우리 사회의 과학적 소양의 일부이기도 하다.&nbsp;그리고 나의 비난은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활동가들에 보다는, <u>정책적 결정을&nbsp;과학적으로 접근하고 그에 관해 과학적으로 시민과 의사소통해야 하는&nbsp;정부의 과학적 소양의</u> 부족함에 대해 가장 큰 비중을 둔다.&nbsp;정부라면 그 사회의 전문성을 아우른 가장 권위를 가진&nbsp;의사 결정 집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또한 이 정부의 부족함 역시 "그들의 문제" 가 아닌 "우리 사회의 부족함"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nbsp;&nbsp;<br><br>마지막으로, 어떤 소수의 과학자는 (혹은 과학주의자들은)&nbsp;증명된 과학의 위대함을 들어 증명되지 못한&nbsp;주장에 그저 면박만을 주곤 하는데, 그 역시 높은 수준의 시민의 과학적&nbsp;소양과는 거리가 멀다. 면박이나 구박은&nbsp;과학이라는 언어에 존재하지 않고, 반박이라는 것이 존재할 뿐이다. 반박은 반박당한 상대와 그 주장을&nbsp;바보나 천치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그들 역시 과학자로 존중하는 담화이다. 과학은 끼어드는 모든 사람을 과학자로 대접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반박의 근거를 들어)&nbsp;설명한다. 이런 과학의 말하는 법이 몸에 배지 않은 과학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과학자이지만 과학적 소양을 더 길러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과학자 집단 역시 친절이라는 과학의&nbsp;고급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과학의 언어는 과학자들에게도 외국어처럼 어색하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nbsp;보아야 할 것이다.&nbsp;</p>			 ]]> 
		</description>
		<category>왜냐면</category>
		<pubDate>Tue, 06 May 2008 03:24:23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Rudy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611511</link>
		<guid>http://egeria.egloos.com/1611511</guid>
		<description>
			<![CDATA[ 
  <div style="TEXT-ALIGN: left"><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4/14/46/e0089846_4802d42f73cdd.jpg" width="294" height="2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4/14/46/e0089846_4802d42f73cdd.jpg');" align="left" /><br></div><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div style="TEXT-ALIGN: left"><div style="TEXT-ALIGN: left"></div><br><br><br><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4/14/46/e0089846_4802d3e07faaf.jpg" width="293" height="35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4/14/46/e0089846_4802d3e07faaf.jpg');" align="left" /><br></div><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			 ]]> 
		</description>
		<category>About Rudy</category>
		<pubDate>Mon, 14 Apr 2008 03:51:57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사칙 연산의 순서에 대해... ]]> </title>
		<link>http://egeria.egloos.com/1558483</link>
		<guid>http://egeria.egloos.com/1558483</guid>
		<description>
			<![CDATA[ 
  <a title="" href="http://sodyssey.egloos.com/1816416">두 온 아흔 넷. 정말로 진지하게 궁금한 수학적 의문</a><br><br>특별히 조사를 따로 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공부한 분야라서 조금은 설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br>a+bxc일 때 곱하기를 먼저하라는 규칙, 즉, 덧셈과 곱셈이 괄호 없이 나란히 놓여질 때 곱셈을 먼저하라는 규칙은 사실은 a+(bxc) 라고 원래 써야하는 괄호를 생략해도 된다는 규칙입니다.<br><br>그런데, 왜 이런 규칙이 생겨났을까요? 이것은 단지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약속인 걸까요?<br>여기서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라는 것은 이 "괄호를 생략해도 된다"는 규칙이 (곱셈,나눗셈)에 대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덧셈,뺄셈)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도 결국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br>그런데, 실제로, 만약 "괄호를 생략해도 된다"는 규칙이 (덧셈,뺄셈)에 적용되는 대안적인 표기체계를 쓸 경우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덧셈과 곱셈이 대등하고 독립적인 위치에 있는 연산이 아니라, 곱셈은 덧셈을 반복하는 것을&nbsp;일반화한 연산이라는 점 때문입니다.&nbsp;<br><br>이런 덧셈과 곱셈의 위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덧셈과 곱셈 사이의&nbsp;연산관계 규칙은, 분배법칙&nbsp;즉 ax(b+c)=(axb)+(axc)라는 규칙입니다.&nbsp;&nbsp;반대로 만약 a+(bxc)라는 계산을 한다면 a는 b와 c에 분배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br><br>다시 말해,&nbsp;덧셈에 괄호가 있으면<br>ax(b+c)=(axb)+(axc) 이지만<br>곱셈에 괄호가 있으면<br>a+(bxc)=a+(bxc) 즉,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생략을&nbsp;하는 것이 표기를 더 간단하게 해 줍니다.<br><br>곱셈,나눗셈을 먼저하고 덧셈,뺄셈을 나중에 하는 것은 이런 표기를 더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칙입니다. 괄호로 순서를 명시해 줄 필요가 없이 단지, 이 규칙만 기억하고 있으면 만사가 편한 것이죠. 그리고 곱셈과 나눗셈을 먼저하는 것이 여러모로 더 합리적이구요.<br><br>수학의 규칙은 대체로 이렇게 표기의 규칙들로 환원되는데,&nbsp;이 규칙들은 많은 경우&nbsp;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성립할 만큼 일반성을 가졌다는&nbsp;이유가 있는 것이지, 그냥 어쩌다 보니 꼭 그렇게 된 것이라는 부분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nbsp;(예를 들면 더하기의 기호가 +로 쓰인다던지 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역사의 우연한 결과물이죠..) <br><br>이런 숨은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수학의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죠.			 ]]> 
		</description>
		<category>왜냐면</category>
		<pubDate>Thu, 27 Mar 2008 16:08:16 GMT</pubDate>
		<dc:creator>Rudy</dc:creator>
	</item>
</channel>
</rss>
